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일레 셀라시에 (문단 편집) == 기타 == * 6.25 전쟁 당시 멀리서 파병하고 이후 한국에도 방한하였으며 공산정권을 세운 멩기스투의 반란군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점을 들어 강한 [[반공주의]]까지 더해져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중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 중 하나였다. 6.25 전쟁 파병으로 생긴 인연 덕분인지 21세기 들어 한국 NGO의 구호개발사업이나 한국 기업의 경제협력 등에서 어느 정도 에티오피아가 특혜를 보는 점은 있다. * [[춘천]]의 이디오피아 카페에 가면 입구에 해당 인물의 초상화가 있다. * [[오리아나 팔라치]]는 살아 생전 그를 만나 보고 "[[독재자]], 권력자일 뿐이다." 라고 비난했다.[* 팔라치가 하일레를 인터뷰한 때는 황태자가 연루된 쿠데타가 있던 후였는데, 하일레는 계속 쿠데타를 거론하며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팔라치에게 빡친 나머지 대체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뭐냐며 쫓아냈다고 한다. 이에 이탈리아계 에티오피아인들이 팔라치를 비난했는데 팔라치는 신경쓰지 않고 이들을 향해서도 '무솔리니 시절 버릇 못 버렸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의 매우 좋은 인식과는 정반대인데, 물론 팔라치의 특성상 인터뷰했던 대부분의 대상에게 비판적, 호전적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녀의 주장은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을 것이나 하일레가 말년에 폭정을 저지르고 사치를 부렸던 터라 팔라치의 평가도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하일레가 전제군주제를 신봉하는 황제였다는 점에서 군주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마냥 곱게 보이기 힘들긴 하다. 다만 에티오피아에서는 하일레를 몰아낸 멩기스투가 하일레 셀라시에 시절의 폐단을 없애기는커녕 [[폴 포트|오히려 수십만명을 죽여대고]] [[공산주의]] 국가로 체제를 바꿨는데도 경제 개발에도 실패하여 수백만이 굶주림에 죽을 정도로 막장스러운 통치를 해 공산주의의 가장 큰 가치인 평등과 빈부격차 해결은커녕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부패로 왕정 국가보다 못 살게 되어서 [[다시보니 선녀 같다|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된 면도 있다.]][* 허나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원래 전 지도자보다 더 악랄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일어나는 현상이긴 하다. 예를 들어서 [[우간다]]의 [[밀턴 오보테]]는 모든 야당을 금지시키고 정적들을 재판도 없이 무기한 구금했던 독재자였지만 그를 쿠데타로 몰아낸 사람이 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이디 아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만행이 많이 가려졌으며 [[루마니아]] 최악의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기 전에 루마니아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역시 잔악한 독재자였으나 사후에 차우셰스쿠가 최악의 독재정치를 펼치는 바람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생전에 저질렀던 만행들이 루마니아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그러나 하일레 본인도 대외적으로 약소국인 에티오피아의 위상을 올렸지만 국내 정책에서 이런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손놓아 버려서 악화시켰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성적으로 셀라시에는 조금 훗날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처럼 외치에선 성공적이었지만 내정에선 나라 말아먹은 실패한 군주였다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 그러나 셀라시에는 본인의 행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20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독립 왕정으로서 특별한 의미는 물론이고 당시에는 세계사적 기준으로도 유서 깊고 근본 넘치는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의 최후의 왕이었다는 본인 능력이 아닌 위치상으로 외부에선 좋게 평가받거나 미화받은 게 사실이다.[* [[전제군주제]]로의 회귀, 사치와 내치 부실 등은 19세기 황실에서 태어난 본인의 한계였을 수 있다.] 단적으로 6.25 전쟁의 인연으로 하일레를 좋게 볼 수밖에 없는 한국이나 아예 대(對) 이탈리아 항전의 역사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해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래스터패리교]]의 영향을 받은 [[아프로센트리즘]] 성향의 흑인 민족주의자들에게 굉장히 부풀려진 칭송을 받을 때가 있다. * 키가 157cm로 작은 편이었다.[* 사촌인 [[메넬리크 2세]]는 183cm로 굉장히 컸다.] 168cm이었던 [[윈스턴 처칠]]과 함께 찍은 사진을 봐도 한 뼘 정도가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처칠은 그냥 1870년대 영국 남성 평균 키보다 약간 작았다.] * 제정 시절에는 [[아디스아바바 볼레 국제공항]]이 하일레 셀라시에 1세 국제공항이었고 아디스아바바 대학교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대학교였다. * 현재 에티오피아에서 그의 손자인 자라 야코브 암하 셀라시에[* 암하 셀라시에 황태자의 아들]가 [[작위 요구자/아프리카#s-2.14|황제위 요구자]]로 거주 중이다. *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웅 [[아베베 비킬라]]가 마라톤 선수가 되기 전 황제의 친위대에서 부사관으로 근무를 했었다. 이후 아베베가 [[1960 로마 올림픽]]에서 아프리카 최초의 금메달을 따내자 과거 무솔리니에게 침략당해 치욕적인 과거를 기억하고 있던 황제는 그가 귀국하자 직접 마중을 나와 아베베 비킬라에게 왕관까지 씌워 주고 금반지와 금시계를 하사하는 등 국민 영웅으로 등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